1. 율곡이이의 생애(1536~1584)
율곡이이는 조선 중종 31년(1536)에서 선조17년(1584)까지 생존했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관향은 덕수(德水), 이름은 이(珥), 자는 숙헌(俶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등이다.
율곡은 나면서부터 영리하여 깨달은 바가 뛰어나서 말을 배우
율곡이이가 왕명을 받들어 학교사목과 함께 저술한 학교의 규범으로 학생훈육과 학생수양에 관한 것을 규정한 가장 상세하고 주체적인 훈규이다. 이것을 학령의 미비한 점을 보충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유학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포괄적이고 밀도 높은 사상이 깃들이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교육의 목적은 선인 양성(최종목적은 성현의 자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교육내용은 소학,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이며 교육방법은 성현의 행실 모방하는 것이다. 숭배대상으로는 공자, 맹자, 정자, 주자가 있으며 실천요목은 孝, 悌, 忠, 信, 禮, 義, 廉, 恥가 있다.
성리학 교육의 의의는 첫째, 인격향상과
사상가로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 이덕무 등을 들 수 있다.
유형원은 사회개혁을 전제로 한 교육 기회균등을 주장하면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학교교육을 통하여 능력 있는 인물을 관리로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익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주체성 있는 역사 의식인이라 주장하고 중국 중심으로
교육이 굉장한 영향을 미친 유학자로서 자리매김한다.
이이는 조선의 성리학을 연구하며 훌륭한 것을 모아 정리하여 완성했으며 인간 개개인의 내적 문제를 실제 현실의 문제로 삼았다. 그리하여 실생활에서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문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율곡은 일생에서 교육에 많은 관
영향을 끼친 이는 어머니 밀양 박씨였다.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 배 더 힘써야 조소를 받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교육 아래에서 엄격하게 바른 몸가짐을 배웠다. 어린 시절 숙부 이우李?로부터 『소학』을 배웠다. 23세에는 성균관에 입학하고, 28세에 진사시에 합격
율곡은 성리학과 불교, 노자와 장자의 사상, 양명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학문을 하였으며, 이러한 사상들을 아울러 율곡의 사상에 수렴하였다. 여러 가지 학문과 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율곡의 학문 방법은 창의성과 융합의 교육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교육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즉, 율곡이이의
교육 방법이 도입되기까지는 유교가 교육의 주된 내용을 이루어 왔다. 이이는 유교적 전통이 우리 민족의 삶을 강하게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유교적 교육을 받고 성장했고, 유교를 정치적, 사회적, 개인적 삶의 원리로 삼았으며 실학교육사상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학자였다. 율곡은 조선의
교육 공도자숭배의 사요를 실행케 하여 평등사회 실현을 도모함으로써 사회개선과 복지사회 건설을 지향하고 있다. 무시선 무처선, 처처불상 사사불공, 영육쌍전 이사병행 동정일여 등의 표어는 원불교 교리사상의 실천적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소태산은 1920년 그의 원불교 창건 5년 4월
이이의 생애는 태어나서 29세까지를 성장기, 30세부터 49세로 사망할 때까지를 사환기(仕宦期)로 구분할 수 있다.
서문, 시화에 뛰어난 신사임당은 이이의 초기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이는 8, 9세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났고,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에 어머니가 별세하자 3년